5월 17일(금)
내가 일 하는 카페는 아침에 커피와 디저트를 묶어 파는 프로모션을 진행 중인데, 그 디저트가 무려 9시가 넘어 도착하는 바람에 있으나마나 한 프로모션이 돼 버렸다. 요즘 들어 디저트 배달이 많이 늦는데 이럴거면 왜 프로모션 진행을 하는지..?
요 며칠 보스가 가게에 오면 모두의 스트레스가 이만 저만이 아니므로 할 일 빨리 끝내자며 속도를 냈고 아침 러시도 간단히 해결한 뒤 쉬고 있는데, 그녀가 도착했다. 아니나 다를까 오자마자 폭풍 잔소리를 시작했으나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감자기 본인이 만들었다는 디저트 자랑을 하면서, 다른 가게의 디저트와 한 번 비교해보자며 우리보고 디저트를 하나 사 오라고 했다. 우리가 없는 동안 가게는 자신이 볼테니. 그런데 보스는 포스 다룰 줄 모르는데 어떻게 손님을 받겠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녀와 1분이라도 함께 더 있느니 나가서 바람이라도 쐬는 게 훨씬 낫기에 망설이지 않고 나섰다. 잠깐의 기분 전환을 마치고 돌아와 보스의 일장연설을 경청한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평온함을 되찾을 수 있었고, 오늘 오전 근무만 하면 되는 나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가게는 나섰다.
집에 돌아와서는 특별하게 할 일은 없다. 내일 무엇을 할지 고민하고 저녁 뭐 먹을지 생각하는 게 일이라면 일이랄까. 가게는 점점 바빠지는데 반해 short staffed의 상황이 되어가고 있어서 매번 지친다. 주말 이틀 동안 별 탈 없이 다른 직원들이 일 하기를 바란다.
5월 18일(토)
한국인 커뮤니티에 가을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는 장소를 추천하는 글이 올라와 남편과 다녀왔다. 감, 자두, 복숭아 등을 재배하는 농장인데 특정 시즌에 소정의 입장료를 받고 농장을 개방한다고 한다. 구글맵의 최근 후기에는 아시안을 향한 인종차별이 있었다고 하길래 내심 걱정했지만, 오늘 인종차별을 겪으면 호주에 와서 처음 인종차별을 겪는다는 사실에 은근히 기대가 돼서(?) 망설이지 않고 출발했다. 9시부터 개방이고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9시 10분 경이었는데도 벌써 15대 이상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 농장은 V자로 된 지면이라 내려갔다가 올라갔다가 하면서 농장 전체를 구경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과일은 4월에 수확하기 때문에 감나무를 제외한 다른 과일 나무는 열매가 달려있지 않았다. 바짝 말라 색이 변한 채 바닥에 떨어져 있는 낙엽을 보니 가을인 게 실감났지만 최고 온도가 28도를 웃도는 지금, 과연 가을이 맞는지 의심스럽긴 한다. 한 시간 가까이 산책 하고 사진 찍고 놀다가 돌아가려고 나오니 이미 주차장은 만차였고, 단체 관광이라도 온 건지 열 명 이상의 사람이 무리지어 있었다. 인종차별.. 할 시간도 없고 당할 시간도 없을 정도로 사람이 붐비는 걸?
이대로 돌아가기는 아쉬운 나를 위해 남편이 선택한 다음 행선지는 바로 댐이다. 소양강 댐, 춘천 댐 할 때 그 댐. 꽤 깊은 산 골짜기로 한참을 들어가고나서야 등장한 댐은 생각보다 아담하고 비가 많이 오지 않는 기후 특성 상 댐에 가둬두고 있는 물의 양도 적었지만, 살면서 언제 내가 댐에 올라와 보겠나 싶은 마음으로 구경했다. 슬슬 아침 식사 기운이 떨어지려고 할 때 남편이 찾아 놓은 카페에 갔는데 가 보니 카페가 아니라 고급 레스토랑 단지였고, 결국 커피 한 잔 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 많이 먹을테니 점심 간단하게 먹고 나가서 후식이라도 먹자고 했던 내 계획은 침대에 누워 책 읽다 보니 어느새 저녁이 찾아와버려 수포로 돌아가버렸다. 오늘 여기저기 운전하느라 피곤했을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며 하루를 마친다.
5월 19일(일)
지금 내 심장은 그 어느 때 보다 빠르게 뛰고있다. 바로 몇 시간 전, 가게에 퇴사 통보를 했기 때문이다. 무려 one day notice를 주고 말이다. 도의상 최소 2주의 시간을 두고 퇴사 의사를 밝혀야 하지만 나는 casual 직원이기 때문에 당일 퇴사 통보도 법적으로 문제 없다. casual직원은 당일 해고 하기도 하는 걸 뭐.
일기에도 여러번 드러냈지만 지난 몇 달간 가게 일이 벅차다는 느낌을 계속 받고 있었다. 일은 끊임 없이 많아지는데 일 하는 직원 숫자는 줄어들면서 업무 과중이 심해졌고, 심해진 그 상황에도 적응하려고 노력했고 실제로 적응도 했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적응 하면 새로운 일이 생기는 반복적인 상황에 더 이상은 못 하겠다,는 생각이 한 두번 들었던 게 아니지만 좋은 직원들, 정 든 단골 손님들과의 인연을 놓고 싶지 않아서 벼터왔다. 하지만 오늘 저녁 새로운 스케줄이 나왔는데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스케줄이었고, 타협 점을 찾을 수 없다는 판단에 즉시 퇴사 통보를 했다. 코워커들에게 미안하게 됐다고 퇴사 소식을 알리는 와중에 전화가 왔고 이런저런 제안을 나에게 해 왔지만 그것 역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합의점을 찾지 못 한채 그렇게 그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지난 10개월 동안 쉼없이 한 곳에서 달려왔고 내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머무를 수 있는 상황, 익숙해진 일을 포기하는 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호주에 올 때 다짐했던 것들 중 한 가지. 다양한 일을 즐기면서 해 보기,를 실현할 수 없는 곳에서는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다. 내 마음가짐의 문제일 수도 있으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나는 지난 10개월 동안 이 가게에 내 최선을 다 했다는 점이다. 갑작스러운 코워커의 퇴사에도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고, 새로운 직원이 오면 트레이닝 시켜 그들이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런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점점 나를 비롯한 코워커들을 몰아세워가고 있으며 나는 인내심의 한계를 경험했다.
남편은 어차피 쉬게 된거 곧 자신의 방학도 시작되니 이참에 한국에 다녀오는 건 어떠냐고 하는데, 그건 그거대로 귀찮은 일이다. 이제 다시 호주에 처음 왔을 때 처럼 새로이 시작해야 한다. 인터뷰, 트라이얼 등 긴장되는 순간들이겠지만 최근 몇 달간의 피로함 보다는 훨씬 나을 것 같다.
5월 20일(월)
퇴사 후 처음으로 쉬는 날. 늘 같은 시간에 일어나 일을 하던 게 습관이 돼서 그런건지 아침 일찍 눈을 떴지만 출근 안 해도 된다는 생각에 더 잠을 잤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 시간에는 뭘 하고 있고, 이 즈음이면 뭘 하고 있고 등등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오늘 하루 만큼은 편히 쉬기로 했다. 하루 종일 누워있고, 책 읽고 밖에 잠깐 나갔다 오는 게 전부였던 하루. 지루하기도 하고, 앞으로 어떻게 구직 활동을 해야 할지 고민 되었다. 이번 주 목요일에 지난 2주치에 대한 주급이 들어오는데 주급 들어오는 것 확인하고 일을 구하기로 했다. 지난 직장에서 퇴사했던 직원들 가운데 퇴사 통보 이후로 주급을 지급 받는 데 시일이 다소 소요된 경우가 있어서, 확실히 주급을 받는지 확인이 필요하다. 앞으로 나는 어디서 일을 하게 될지, 어떤 일을 하게 될지 궁금하다.
오후에는 매니저가 카페에 아직 있냐고 연락이 왔다. 어제 쉐프와 보스에게만 이야기하고 매니저에게는 소식을 전달하지 않아서 내가 퇴사한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만 두게 됐다는 문자를 보냈더니 전화가 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봤고, 짧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사실 매니저는 내가 지난 몇 달 동안 힘들어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 선택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고, 자기가 매장에 신경 못 쓰는 동안에도 잘 일해줘서 고맙다는 말로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나도 고용해줘서 고맙다는 말로 감사함을 전했다. 이로써 전 직장과의 인연은 끝났다.
5월 21일(화)
남편은 오전에 학교가고 오랜만에 집에 혼자 남게 되었다. 할 일이 없는 관계로 집 뒷 마당에 잔뜩 쌓인 낙엽을 쓸고, 정리하고 점심 먹고 남편이 오기를 기다렸다. 나의 갑작스러운 퇴사로 인력 난에 시달렸을 전 코워커들에게 미안해 전화해서 사과했더니 나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니 괜찮다고 했다. 말은 괜찮다고 했는데 어제, 오늘 출근한 코워커의 상태를 보면 안 괜찮을 것 같은데..
이력서 마무리 하고 책 읽고 가만히 집에만 있으니 좀이 쑤시다. 남편 말대로 좀 쉴까 생각하기도 했는데 집에서 할 게 없는 걸? 일기에 쓸 말조차 없을 정도로 단조로운 일상이다. 내일부터는 본격적으로 구직 활동을 시작해봐야지.
5월 22일(수)
아침부터 주차장 공사한다고 시끄럽고 현관문 페인트 칠 하느라 집 안팎으로 손님이 많았다. 오늘은 내 비자 신청 관련해서 오전 내내 자료 준비하느라 시간을 보내고 이력서도 업데이트 했다. 지난 10개월의 호주 경력이 생기니 한층 든든했다. 호주 경력은 글자 크기를 키웠고, 한국에서의 경력은 글자 크기를 줄였다. 호주 경력을 더 눈에 띄게 하기 위한 나만의 작은 꼼수랄까.
오후에는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구인 하고 있는 카페 두 곳에 메일로 이력서를 전달했다. 나는 첫 카페 구직도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 성공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같은 방법으로 구직을 할 생각이었다. 문제는. 전 카페 매니저가 페이스북 페이지에 가입되어 있다는 것인데, 상관 없지만 괜히 민망하달까. 남편은 목요일에 주급 들어오는 거 확인하고 구직 글을 올리는 건 어떠냐고 하길래, 구직 글을 올리는 것은 목요일 이후로 미루기로 했다.
메일을 보낸지 얼마 되지 않아 한 카페에서 답장이 왔다. 이번 주 중에 트라이얼을 하자고 해서 내일 오전에 두 시간 유급 트라이얼을 하게 됐다. 세상에, 유급 트라이얼은 호주 온지 10개월 만에 처음이다. 다소 긴장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데 다른 한 곳에서는 문자 메세지가 왔다. 오늘 짧은 인터뷰가 가능하냐고 해서 쇠뿔도 단김에 뽑으랬다고 바로 가게에 향했다. 간단한 인사와 5명 정도의 커피 주문을 받고, 라떼 하나 만들어보고 인터뷰는 종료됐다. 다음주 월요일 즈음에 3시간 정도 트라이얼 하자고 하길래 오케이 하고 짧은 인터뷰는 20분 만에 끝났다.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서 어안이 벙벙하지만, 이력서를 보낸 두 곳에서 모두 트라이얼을 할 수 있어 내게는 잘 된 일이다. 내일부터 다시 열심히 달려보자.
5월 23일(목)
간 밤에 잠을 거의 못 잤다. 긴장돼서 그랬겠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뒤 겨우 몸을 일으켜 오전 6시 30분에 시작하는 트라이얼에 다녀왔다. 호주 현지인 여성 3명이 근무하는 시프트에 포함 돼 두 시간 일 했는데, 시티에 있는 카페는 정말 숨 쉴틈 없이 바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에 일 했던 카페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지만 그래도 금방 적응해 샷도 빨리 뽑고 우유도 금방 스팀해서 주문이 밀리지 않고 제 때 손님들에게 나갈 수 있었다. 전에 일 하던 카페는 작은 카페라 손님들에게 커피를 손으로 건네주곤 했는데, 바쁜 카페에서는 테이블에 내려놓고 이름 부르면 알아서 찾아가는 것이 신기했다. 바빠서 그런지 우유 디스펜서라고 할까 버튼 누르면 용량에 맞게 데운 우유가 나왔는데, 사람이 직접 스팀하는 것 보다는 부족한 부분이 있지만 손님들도 별 불만 없이 커피 가져가는 걸 보면, 퀄리티 보다는 바쁜 아침에 빨리 커피 마시고 싶은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으로 추측했다. 나도 커피 한 잔 마셔도 될까,라고 말 할 새도 없이 두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고 매니저와 앉아서 얘기하는데 잠은 못 자서 졸리지, 미리 질문 할 것 생각을 안 해놔서 말 할 것도 없지, 오히려 일 하는 것 보다 매니저와 얘기하는 짧은 5분이 더 힘들었다. 나만 시간이 맞으면 다음 주 부터 같이 일 하고 싶다길래 나도 좋다고 했고, 아직 트라이얼이 하나 더 남아있기 때문에 다음 주 월요일 시프트는 빼 달라고 나중에 말 해야지,하고 트라이얼 시급 50불까지 받고 집에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어제 면접 본 카페에서 오늘 당장 트라이얼 올 수 있냐고 물어봤는데, 오늘 한꺼번에 잠을 못 잔 탓에 머리가 너무 아파서 가더라도 조금 쉬고 가자는 생각에 오후부터 시간이 된다고 했더니 내일 오전에 와달라고 했다. 나도 하루 쉬고 가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아서 알겠다고 했다. 오늘 트라이얼 한 곳 합격을 했으니 내일은 편한 마음으로 트라이얼 할 수 있을 것 같다. 똑같이 엄청 바쁜 카페인데 오늘의 트라이얼 경험이 내일의 트라이얼에 많은 도움이 되겠지. 아, 일주일 맘 편히 쉴 새도 없이 일 하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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