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3일(금)
노이로제라도 생긴 것 마냥 빨간 차만 보면 가슴이 벌렁거린다. 아, 보스의 차가 빨간색 스즈키다. 길에 보이는 모든 빨간 차가 보스 차인 것만 같다. 오늘도 어김 없이 그녀가 왔지만 다행히 외부인과의 짧은 미팅 이후 바로 자리를 떴다. 나도 오전 시프트라 그녀가 다시 돌아온다고 해도 마주칠 이유가 없어 기분 좋게 오전 시간을 보냈다. 지난 4일 동안 사람 들들 볶았으면 하루 정도는 쉴 때도 됐지. 가게에 필요한 것이 있어 마트 다녀왔다가 바로 퇴근해 점심 먹고 남편 픽업하러 학교로 운전 해 갔다. 최근에 남편 학교는 밤에만 갔는데 낮에 가니 도로에 차도 많고 분위기가 달랐다. 요 며칠 비가 오고 난 덕분에 공기가 더 맑아지고 시원해 찬문 열고 바람 맞으며 운전을 즐겼다.
남편 픽업하고는 마트에 들러 장 보고 일 주일 잘 마무리 한 셈 치며 파닭전에 맥주를 곁들여 먹었다. 술 한 잔에 피로를 다 씻어낼 수는 없지만 이렇게 한 주가 끝났다는 생각을 하며 모든 피로를 내려놓는다. 금요일 퇴근 이후로는 가게 생각을 일절 하지 않는데 이번 주는 특히 더 하지 않으려고 한다. 월요일부터 너무 시달렸기 때문에. 마음 편하게 푹 자야지.
5월 4일(토)
컨디션이 좋은 날은 아니었지만 환상적인 가을 날씨를 이른 아침부터 즐기러 밖으로 나갔다. 공원에서 한참을 걷고 남편이 필요한 옷이 있다고 하길래 어디서 쇼핑을 할까 하다가 우리나라로 치면 '아름다운 가게'에 가 보기로 했다. 두 개 지점에 다녀왔는데 지점마다 기부 받은 옷이 달라서 보는 재미는 있었지만, 남자 옷은 많지 않은데다 좀 괜찮다 싶은 옷은 사이즈가 너무 커서(무려 3XL) 별다른 수확은 없었다. 택도 떼지 않은 새 옷이 생각보다 많던데 입어보지도 않을 옷을 왜 사 놓고 기부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튼 옷은 그냥 마트 가서 제대로 된 것을 사기로 했다.
한국 마트 들렀다 집에 와서 점심 먹고 쉴까 하다가 좋은 날씨 마저 즐기고 싶어 왕복 한 시간 거리의 공원까지 걸어갔다 왔다. 공원 벤치에 앉아서 한창 가을 분위기를 즐기는데 한국 참새 정도 크기의 새가 겁도 없이 우리 벤치로 와 한참을 앉아있었다. 사람이 안 무서운건지, 우리가 뭘 먹을 줄 알고 기다렸던 건지 모르겠지만 가까이서 새를 본 게 처음이라 신기했다. 날아가 버릴까 차마 손을 내밀지는 못했지만 가만히 앉아서 뚫어져라 쳐다보는 모습이 정말 귀여웠다. 어제는 차에 엄청난 크기의 새 똥 테러를 맞았는데... 어제 오늘 새랑 자꾸 엮이는 날이었다.
요리하기 싫어서 저녁으로는 피시앤칩스를 먹었는데 맥주까지 함께 마시니 술술 들어가 과식했다. 그래도 오랜만에 만 보 넘게 걷고 운동도 했으니 한 번쯤의 과식은 괜찮을 거다.
5월 5일(일)
평범한 일요일. 8시가 다 되어서야 일어나 청소하고 쉬고 낮잠도 푹 잤다. 읽고 있는 책이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데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을 정도로 몰입하게 된다. 나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졸음에 젖은 무거운 눈꺼풀 뿐. 기나긴 이야기가 어떻게 막을 내릴지 한 장 한 장 책을 넘길 때마다 긴장되고 궁금하다. 남편은 이 책을 고등학생 때 한 번, 신혼여행 때 한 번 읽었다는데 아무리 물어도 결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다. 궁금해서 결말을 알고 완독하고 싶은 마음 반, 모른 채로 긴장하며 결말을 알고 싶은 마음 반이다.
최근들어 남편이 살이 빠진 것 처럼 보이긴 했는데 몸무게를 쟀더니 연애시절까지 통틀어 최저 몸무게를 달성했다. 요즘 저녁 먹고 간식을 잘 먹지 않는데다 학업 스트레스로 인해 아무리 고봉밥을 먹어도 살이 안 찌는 듯 하다. 간식도 챙겨주고 다시 살 찌울 수 있게 서포트를 많이 해야겠다.
5월 6일(월)
한국은 임시공휴일이라던데, 나도 한국에 있었으면 오늘 쉬었겠다. 오늘 유독 아침부터 날씨가 추워 덜덜 떨면서 출근했다. 그래봤자 아침 기온 9도였는데, 한국에서도 이렇게까지 추워했었나 싶다.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캐나다 사람도 호주 겨울이 유독 춥게 느껴진다고 하는 영상을 봤는데 호주의 찬 바람이 남다른긴 한가보다.
아침에 분명 매니저가 차를 끌고 가게에 오는 것을 봤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가게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잘못봤나 싶었는데 보스가 먼저 가게에 도착 한 것을 확인하고 그대로 떠났던 것이었다. 휴대폰을 뒤늦게 확인했는데 아직 가게에 보스 있냐고 묻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없다고 하니 그제서야 나타났다. 매니저 조차 보스를 마주치고 싶어하지 않는데 우리는 오죽할까. 가게는 그럭저럭 바빴다. 무난하게 마무리 했던 하루.
5월 7일(화)
보스도 매니저도 없이 평안했던 하루였다. 지난 주에 왔던 이상한 손님이 다시 방문한 것 때문에 코워커가 막판에 멘탈이 터진 것 빼고는. 보아하니 자기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이 필요한 것 같은데 누가 정신 나간 사람 이야기를 듣고 싶어할까. 코워커가 눈을 안 마주치고 설렁설렁 대답했더니, 왜 그렇게 무례하냐고 했단다. 정신 나간 사람 말 신경쓰지 말라고 했지만 적잖이 상처 받은 표정이었다.
웬일로 남편 수업이 끝나는 시간과 가게 끝나는 시간이 비슷해 퇴근 후 남편을 데리러 갔다. 아직 퇴근시간도 아닌데 차도 많고 길이 좀 밀려서 운전하느라 힘들었다. 출퇴근 길은 네비 틀지 않고도 운전 할 수 있는데 남편 학교로 가는 길은 늘 긴장 된 상태로 운전한다. 그래도 무사히 남편 픽업 완료.
내일 저녁에는 코워커 초대해서 떡볶이 해 먹기로 했다. 오늘 적잖이 스트레스 받았을텐데 떡볶이로 스트레스 풀자고 했더니 너무 좋다고 한다. 오랜믄에 먹는 떡볶이라 나도 신난다. 무사히 내일 하루가 지나가기를.
5월 8일(수)
오늘은 어버이날. 전화 드렸더니 해외 여행 가신다고.. 나 없어도 잘 놀러다니시네.
오후 2시부터는 손님이 하나도 없어서 여유롭게 마감 청소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틀 연속으로 왔던 이상한 손님이 오지 않아서 더 마음이 편했던 하루.
저녁에는 코워커 초대해서 떡볶이를 해 먹었다. 아무래도 매운 걸 못 먹을테니 매운 대신 단 맛의 떡볶이로 그녀의 입맛을 잡는 데 성공. 그 동안 해 먹은 떡볶이보다 훨씬 맛있었는데 어묵이 들어가서 그런 것 같다. 떡볶이 먹고 이 얘기 저 얘기 하면서 눈 깜짝 할 사이에 4시간 가까이 흘렀다. 재미있는 얘기를 하면서 크게 웃었는데 남편 왈, 밖에서도 내 웃음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고 했다. 코워커 바래다주고 씻고 누우니 벌써 10시가 다 돼간다. 9시 반이면 불 끄고 자는데 조금 늦었네. 내일 아침에 일어나기 쉽지 않을 것 같다.
5월 9일(목)
코워커가 제대로 화 났다. 늦은 오후에 온 한 손님 때문인데 샌드위치에 이것 저것 추가해달라길래 추가 요금 붙는다고 하니 지난 번 왔을 때는 할인 해 주고 다 공짜로 해 줬네, 누가 봐도 뻔한 진상 레퍼토리를 시작하는 거다. 추가 요금 붙이는 게 내 잘못은 아니고 나는 내 일을 하는 것 뿐이라고 말 하니 그러면 이런 상황을 매니저에게 말이라도 해서 정책을 바꾸라는 조언 아닌 조언을 해댄다. SNS에서 접한 완전체 진상 관련 일화에 이미지 트레이닝이 돼서 그런가 이 정도면 약과다,는 생각이었다. 나와의 대화는 그렇게 끝나고 문제는 코워커가 주문 확인을 하는 과정에서 포장이냐고 물으니 Take away라고 소리를 빽 질러 주방에 있던 나에게까지 선명하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지를 것 까진 없잖아.. 코워커는 놀란 것도 놀란거지만 기분이 너무 나빠 주체를 할 수 없었는지 평소 나쁜 말 전혀 안 하는 애가 F..로 시작하는 그 단어를 내뱉기 시작했다. 이렇게 글로 쓰니 분위기가 사뭇 심각했을 것 같은 느낌이지만 실제 분위기는 생각보다 웃겼다. 공짜 좋아하다 머리 벗겨질 사람인 것 마냥 이것 저것 다 공짜로 달라고 떼쓰는 그들의 모습과 코워커가 욕 하는 모습이 웃겨서 머신 뒤에 숨어 얼굴 빨개지도록 한참 웃다가 겨우 진정 할 수 있었다.
아, 그들은 한국 사람들이 기피하는 특정 국가 출신의 사람들이었는데 왜 기피하게 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의 남편이 매니저에게 전해달라는 말 중에는 '이런 정책이라면 손님을 계속 잃을 것이다.'도 있었는데, 제발 그들을 잃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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